허구연 KBO 총재(사진=스포츠춘추)
허구연 KBO 총재(사진=스포츠춘추)

[스포츠춘추]

# 원래 오전 8시 출근이었다. 마음 같아선 7시에 출근하고 싶었다. 하지만, 8시 30분으로 출근 시간을 늦췄다. ‘당신이 7시나 8시에 출근하면 다른 임직원도 그 시간에 출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를 듣고서다.

출근 시간은 그렇다손 쳐도 그를 망설이게 한 건 따로 있다. 퇴근 시간이다. 마음 같아선 오후 6시 이후에도 사무실에 남고 싶었다. 남아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싶었다. 일을 해도 해도 부족한 게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됐다. ‘당신이 사무실에 남아 있으면 다른 임직원도 자릴 떠날 수 없을 것’이란 충고 때문이었다.

허구연. 신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다. 3월 29일 KBO 총재 취임식이 끝난 뒤 그는 매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KBO 회관에서 출·퇴근한다. 오전 8시 30분 출근해 정확히 오후 6시 퇴근한다.

“당연히 신기하죠. 매일같이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 총재가 없었으니까. 더 신기한 건 허 총재의 경우 정해진 외부행사가 없으면 사무실에 남아 계속 업무를 본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더욱 신기한 건….” KBO 직원은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뭔가를 찾았는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니까 야구 기사에 허 총재님 사진 많이 나오네요. KBO 회관에서 퇴근하면 대부분 야구장에 가시더라고요. 오후 10시 넘어 경기 끝날 때까지 계신 거 같은데. 역대 총재님 가운데 정말 이런 분은 처음이에요. 그래서 KBO 직원들 사이에서 허 총재님 별명이 생겼어요. 뭔지 아십니까.”

4월 24일 잠실야구장에서 함께 경기를 관전하는 허구연 KBO 총재(사진 좌로부터)와 오세훈 서울시장(사진=엠스플뉴스)
4월 24일 잠실야구장에서 함께 경기를 관전하는 허구연 KBO 총재(사진 좌로부터)와 오세훈 서울시장(사진=엠스플뉴스)

# 허 대리. KBO 직원들이 붙인 별명이다. 보통 회사에서 대리는 그 회사의 허리 역할을 담당한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시쳇말로 아직 군기가 남아 있는 대표적 직위가 바로 대리다. 

KBO 직원들이 허구연 총재를 ‘허 대리’로 부르는 이유는 출·퇴근 시간이 확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야구장에서 오후 10시가 넘도록 있어서도 아니다. KBO 어느 임직원들보다 야구계 돌아가는 사정과 현안을 잘 아는 까닭이다. ‘야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다’는 위기감에 누구보다 긴장을 늦추지 않기 때문이다.

허 총재는 총재 취임 이후 줄곧 지방을 돌았다. 지금도 돈다. 지방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지자체장을 만나는 게 기본 코스다. 지자체장을 만나면 ‘야구계가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뻔한 호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보단 야구단이 왜 지역에 필요한지, 야구단이 도대체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일방적 호소보다 지자체가 야구단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이 더 많은 지원을 끌어낼 지름길임을 아는 것이다. 역대 다른 총재들도 지자체장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만나서 새 야구장 건설, 야구계 지원 등과 관련해 얘길 나누길 바랐다. 

하지만, 잘 안됐다. 이유는 간명했다. 지자체들이 안 만나줘서다. 대기업 오너 출신 총재를 만나면 혹여나 “재벌기업들에 혜택을 줬다”는 오해를 살까 싶어 피하기 일쑤였다. 한물간 정치인이나 교수, 재단 이사장은 만나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이런저런 핑계로 만남을 기피했다.

따지고 보면 총재들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누굴 시켜 만남을 타진했다가 지자체에서 미온적 반응을 보이면 ‘내가 누군데 감히’하고 역정을 내고서 ‘만나기 싫으면 관두라고 해’하며 토라졌다.

염태영 전 시장(사진 오른쪽 가운데)이 4월 5일 허구연 총재(사진 왼쪽 가운데)와 만나 한국야구 발전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염태영 전 시장(사진 오른쪽 가운데)이 4월 5일 허구연 총재(사진 왼쪽 가운데)와 만나 한국야구 발전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허구연 총재와 지자체들의 만남은 대부분 후자의 요청으로 이뤄진다. 구단으로선 고마운 일이다. 어느 구단 단장은 “지자체장과 만나 현안을 숙의하려고 하면 담당 공무원 대부분이 ‘우리가 도와드리면 시장님이 대기업 편들어줬다는 얘길 듣습니다’하고 난색을 보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기업이 모그룹인 구단들은 연고지 지자체에 뭔가를 요구하고, 읍소하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돼요. 그럴 때 구단을 대신해 나서줘야 하는 게 KBO 총재에요. 지금 허 총재가 지자체장들 만나면서 열심히 뛰고 있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모든 구단이 고마워할 겁니다.”

지금 프로야구에 필요한 건 권위의 상징인 ‘허 총재’보단 야구계 부흥을 이끌 성실하고, 정열적인 탈권위의 ‘허 대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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