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연이 전하는 야구의 모든것

[Why] 그의 구라, 800만 관중 흥을 돋우다 - 조선일보 (2018.03.24)

허프라 ㅣ 2018.03.29 11:28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프로야구 개막 앞두고 만난 허구연…
지루한 투수전도, 실책 남발 졸전도 그가 해설하면 재밌다


프로야구 개막을 사흘 앞둔 21일 넥센과 LG의 시범 경기가 열린 서울 고척 스카이돔을 찾은 허구연 해설위원.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돔구장 예찬론자’지만 “고척돔은 아쉬운 부분이 참 많다”고 했다.
그는 “올해 프로야구는 전력이 평준화돼 어느 때보다도 흥미진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종찬 기자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감독이자 박찬호의 대부(代父)이기도 한 토미 라소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가장 기쁜 날은? 봄바람과 함께 서른일곱 번째 프로야구 시즌이 돌아왔다. 10개 구단은 오늘(24일)부터 9개월여 동안 144경기의 장정(長程)에 나선다. 흔히들 야구는 인생을 닮았다고 한다. 이기는 날도 지는 날도 있다. 9회 말 2아웃 역전의 묘미도 있다. 끝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누구든 노력에 따라 새로운 승리의 역사를 쓴다.

야구장의 희로애락을 구장 너머, TV 화면 너머로 풀어내는 직업이 해설가다. 과학적인 분석은 기본이고 박진감과 매력 넘치는 '구라'도 필수. 훌륭한 해설가는 때론 선수보다 더 사랑받고, 존재 자체로 역사가 된다. 67년간 LA다저스 경기를 중계한 빈 스컬리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허구연(67) 해설위원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40년 가까이 야구장 중계석을 지키고 있다. 야구는 몰라도 그의 해설이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이는 드물다. 특유의 발성과 사투리로 풀어내는 흥미진진한 야구. 지루한 투수전도, 실책이 남발되는 졸전도 그가 해설하면 재밌다. 해설 한마디 한마디가 실시간으로 '팩트 체크' 되는 시대. 그의 해설이 '투박하고 경쟁력 없다'는 반론도 있다. 선수도 아닌데 안티팬도 생겼다. 하지만 그 안티팬마저도 인정하는 그의 차별이 있다. 바로 야구를 향한 '편애'다.

더그아웃 누비며 취재하는 60대 해설가

그의 관록은 손때 묻은 취재수첩과 기록지에서 나온다. '보이는 화면만 중계해선 좋은 해설을 할 수 없다'는 게 지론. 선수들 주례 요청이 끊이지 않고, 공로상도 제법 받은 야구계 '어르신'이지만 중계방송 3시간 전부터 더그아웃을 누비며 취재한다. 현장에서 선수들의 기록과 컨디션, 전략을 모두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생중계 해설은 준비한 것의 5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오프시즌'인 겨울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미국엔 매년 가나.

"1984년 피터 오말리 다저스 구단주의 초청으로 처음 미국을 방문한 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갔다. 미국 야구는 끊임없이 발전하니까. 현장을 보고, 선수와 구단 관계자를 만나 야구뿐만 아니라 구단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통찰을 얻는 게 목표다. 올해도 30일 정도 다녀왔다. 일본의 오타니가 화제라길래 유심히 지켜봤다."

―현장에서 본 코리안리거의 모습은.

"(류)현진이는 기대해도 좋을 거다. 시범경기 때부터 92마일(148㎞)을 던진다. 배지현 아나운서의 '내조'도 잘 받고 있다. '잉꼬부부'가 따로 없더라. 이번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FA)가 되기 때문에 동기 부여도 확실하다."

―올해 프로야구 관전 포인트는?

"세 시즌 연속 최하위에 머문 KT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내가 10구단 창단에 제일 앞장섰는데 면목이 없더라. 하지만 이번 시즌엔 기대해도 좋다. 고교 무대를 평정했다는 신인 강백호의 합류도 있고. 해설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각팀 전력이 어느 때보다도 상향 평준화돼 있다."

―몇 년 새 선수 출신 해설자가 많아졌다.

"항상 조용필 노래만 들을 수 있나. 송창식, 태진아도 듣고 걸그룹도 있어야지. 다만 이름값이 해설자로서의 성공을 담보하진 않는다. 공부를 충분히 해서 머릿속에 최대한 다 넣어와야 한다. 요즘은 기록원이 현장에서 바로 자료를 넘겨준다. 그런데 정작 이걸 보다가 현장 상황에서 눈을 떼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 보고 설명하면 시청자 입장에선 한 박자 늦다."

―사투리가 잘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청자도 많은데.

"고칠 생각도, 고쳐지지도 않는다(웃음)."

―특정 선수를 편애한다는 지적이 있다.

“속뜻을 잘 몰라서 그렇다. 어린 선수를 키우고 싶은 애정으로 이해해달라. 야구는 스타 신인이 필요하다. 일본은 고시엔에서 활약하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 선수를 보기 위해 구름 관중이 몰리고. 우린 아마 야구가 다 죽어버려 떡잎 찾기가 힘들지 않나. 그래서 좀 한다 싶은 어린 선수가 등장하면 유심히 지켜본다. 정수빈, 구자욱, 나성범이 그랬고. 애정을 가지고 자주 언급하다 보니 그 점이 타 구단 팬들 보기엔 불편했나 보다.”

―한때 하일성과 ‘양대산맥’이라 불리며 비교됐다.

“이미자와 패티김처럼 스타일이 달랐다. 하 위원은 구수한 입담과 순발력이 일품이었고.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없었다. 같이 야구계를 위해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혼자 남아 종종 외로움을 느낀다.”(하일성은 생전에 “깔끔하고 분석적인 허 위원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긴장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기승전돔’ 별명 싫지만은 않아

별명이 많다. 기승전돔(어떤 얘기를 해도 결론은 돔구장으로 끝난다는 뜻), 허프라(허구연과 인프라의 합성어), 돔징징…. 그만큼 열악한 야구 인프라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많이 내왔다. 그도 이런 별명이 “싫지만은 않다”고 했다.

―인프라 얘기 참 많이 들었다. 때론 삼천포로 빠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구로 먹고살아온 인생이다. 야구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다. 해설자는 방송이 아니면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경기 중에도 소강 상태가 있으니까 틈날 때마다 인프라 얘기를 한다. 주변에서 하도 뭐라 하니까 내가 참은 적도 많다(웃음).”

―훈수만 두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발전위원장을 맡아 9년 동안 전국을 다녔다. 국내에 사회인 야구팀이 2만개나 있는데 야구장은 200개에 불과했다. 임기를 마칠 무렵엔 500개가 넘어갔다. 4대 강 사업 당시 개발 시안에 야구장이 하나도 없더라. 눈이 뒤집혀져서 관계자를 붙잡고 늘어져 22개면을 깔았다. KBO에서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래야 눈치 보지 않고 봉사할 수 있으니까.”





허 위원은 지난 2월 류현진(가운데) 선수가 소속된 LA다저스의 스프링 캠프가 있는 미국 애리조나를 찾았다. 매년 겨울 미국에서 한 달 남짓 머물며 야구를 공부한 지 올해로 30년째다.
/허구연 인스타그램


―프로야구 관객이 2년 연속 800만을 돌파했다.

“인프라가 수요를 견인한다. 광주, 대구에 좋은 구장이 들어섰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 이젠 숫자에 안주하지 말고 ‘산업화’에 초점을 맞출 때다. 구단들이 매년 수백억을 써가며 시민들에게 훌륭한 여가의 장을 만들어준다. 경기장 안에 지자체 홍보물이 왜 있나. 지자체는 손을 떼고, 구단이 돈을 벌게, 자립하게 해줘야 한다.”

―그렇게 바라던 돔구장이 들어섰는데.

“단언컨대 ‘21세기 최악의 돔구장’이라 표현하고 싶다. 미국 휴스턴의 미닛메이드 구장을 봐라. 비슷한 돈 들이고도 얼마나 잘해놨냐. 기왕 짓는 거 부대 시설도 더 넣고 크게 지었어야 한다. 관중석 의자 색깔부터 펜스까지 디테일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정치권으로 들어가 야구 발전에 앞장서는 것도 한 방법일 텐데.

“순진한 소리다. 여야로 갈라지면 되던 일도 안 된다. NCKT 창단 과정에서 창원과 수원 지자체장을 만나 설득했다. 내가 소속이 있는 정치인이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여의도에서 숱한 영입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우리나라는 왜 모든 게 정치로 귀결돼야 하는지 불만이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스트레스 없는 전화위복의 달인

대중에겐 해설가의 모습으로 익숙하지만 원래는 장래가 촉망받는 야구 선수였다. 야구도시 부산에서 자라 5학년 때 처음 배트를 잡았고, 줄곧 4번 타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경남고와 고려대, 실업팀을 거치며 선수로서 승승장구했다.

―공부도 잘했다고 들었다.

“사법고시에 패스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71학번 체육 특기자로 고대에 입학했지만, 예비고사를 다시 봐서 72학번으로 법대에 들어갔다. 야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수업을 들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침 9시에 중간고사를 보고 낮에 동대문야구장에 가서 홈런을 2개 친 날도 있었고.”

―공부할 시간에 운동을 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된 생각이다. 부모들이 착각하는 게 모두가 김연아, 손흥민이 될 수는 없다. 엘리트 중심의 체육 정책 때문에 낙오한 99%는 바보가 된다. 스탠퍼드에 진학한 프로골퍼 미셸 위를 좋아한다. 공부한 시간만큼 골프 연습은 못했겠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미셸 위 같은 사람이 승자다. 메달 1~2개 더 따는 게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

1976년 대전에서 열린 한·일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하고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전화위복이 그의 인생이었다. 병상에서 법전을 들고 공부를 시작해 고려대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선수생활을 접은 그가 법대 교수가 되고 싶어 강의에 매진할 즈음 프로야구가 태동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MBC로부터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 “전임강사가 되기까지 불과 몇 달을 앞둔 시점이라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교수라는 게 법학 외에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교양을 요구하는 직업이더라. 한계를 느껴 야구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허구연은 사구(四球)라는 일본식 표현 대신 ‘베이스 온 볼스’라는 미국 본토 야구 용어를 사용해 인기를 끌었다. 일일 출연료가 아닌 연봉을 받는 최초의 프로 해설가이기도 했다. 1985년엔 청보 핀토스 창단과 함께 감독으로 선임됐다. 만 34세의 최연소 사령탑은 주목을 받으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내내 꼴찌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허공만 바라보는 허구연’ ‘허구한 날 지는 허구연’ 같은 말들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8승23패의 성적으로 불명예 중도 퇴진했다.

―감독 시절 언급을 꺼린다고 하는데.

“흑역사라면 흑역사지. 여러모로 실력이 부족했다. 임기도 3년을 보장해준다고 해서 간 건데, 그걸 믿었던 나도 순진했고. 과정 대신 성적만으로 평가받는 현실이 아쉬웠다. 이후 토론토에서 코치로 있으면서 휘둘리지 말고 해설과 야구 발전에만 신경 쓰자고 확실히 진로를 정했다. 나중에 현대 등 여러 구단에서 감독 제의를 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한국의 ‘빈 스컬리’를 꿈꾸며

어찌 보면 해설가는 극한 직업이다. 조금이라도 실언을 하면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3~4시간에 걸쳐 중계를 하고 나면 온몸의 진이 빠져 어떨 때는 말도 안 나온다”고 한다. 1주일에 평균 3경기를 중계한다. 2007년 이승엽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경기 중계를 2시간여 앞두고 모친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구 중계를 다 끝내고서야 빈소를 찾았다. 그는 “시청자와의 약속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신체 나이는 아직 40세라고 하더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니까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다. 1년 전 동료 김선신 아나운서가 소개해줘 인스타그램도 시작했다. 팔로어가 1만명이 넘는다. 요즘은 세 살짜리 손녀 딸과 놀아주는 걸로 피로를 해소한다.”

―해설 인생 최고의 경기를 꼽는다면.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그전까지 구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예상도 못했던 일이니까 ‘대쓰요’ 소리가 절로 다 나더라.”

―70을 바라보는 나이다. 은퇴는 언제 하나.

“은퇴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는 자연스레 물러나야겠지. 다만 우리나라 스포츠계에서 캐스터와 해설자, 기자가 너무 단명한다는 아쉬움은 있다. 한 선수의 데뷔 시절부터 현재까지 모두 본 기자가 쓰는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자가 쓰는 기사는 천지 차이지 않나. 해설도 마찬가지다.”

허구연은 2016년 미국에서 빈 스컬리를 만났다. “간결하고 듣기 쉬운 해설과 더불어 그 나이까지 방송을 하면서 건강을 유지했다는 점이 부러웠다”고 했다. 빈 스컬리가 은퇴할 당시 그의 나이는 89세였다.

[김은중 기자 email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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